경희대학교 Miwon Lec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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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벨의 정치철학과 한국의 시민사회
하벨(Václav Havel, 1936-2011)은 공산국가의 일당 독재 체제에 저항한 체코슬로바키아 극작가이다. 다원성을 허용치 않은 체제의 성격상 반대당이란 있을 수 없었다. 반대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면 그것은 저항 지식인이었다. 1989년 소비에트 블록이 무너질 때 지도력을 행사할 수 있는 세력은 저항 이력을 가진 지식인 이외에 아무도 없었다. 일당 독재에 저항한, 그리하여 큰 희생을 치른 지식인이 국가의 수뇌부에 대거 진입하게 된 것은 이 때문이었다. 하벨 또한 그러하였다. 그는 탈공산화 직후 체코슬로바키아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공산당이 만들어낸 체제에서 인간성이 파괴되는 과정을 날카롭게 관찰하고 이를 폭로하였다. 거친 전체주의의 무시무시함 대신에 퉁명스러운 ‘후기 전체주의’의 무미건조함이 삶을 다스리고 있었다. 국가는 단순 생존의 문제에 집중하도록 인민을 몰아갔다. 상부에서 시키는 대로만 하면 모두가 큰 탈 없이 먹고 살 수는 있게 되었다. 최소한의 생활과 안락을 보장받는 대가로 인민 모두는 진실한 삶에 대한 책임감과 모든 것 위에 자리해야 할 진리에 대한 분별력을 내동댕이치고 체제에 잠잠히 복종하는 삶을 이어갔다. 따지고 보면 후기 전체주의의 모습은 반드시 공산 체제에 한정될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유를 구가한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나타나는 바다. 정치가 전문가에 의해 경영되고 권력이 관료에 의하여 조정되면서, 모두가 물질 획득의 일상에 휩쓸려 그 너머 정신의 부유함을 내버리고 살아가고 있다.

하벨은 이 현실 문명에 저항한다. 그는 인간의 판단과 기준으로 만들어진 것은 그 어떤 것이든 유한하고 한정된 것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비판해서는 안 될 영원한 절대의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 모두가 다 불완전한 잠시의 것이다. 인간들이 벌이는 끝없는 다툼과 싸움은 모두 이 땅 위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다.지역과 국가 그 모든 경계를 넘어서는 보편스런 책임감, 현존하는 것 위의 어떤 것에 대한 더욱 높은 책임감을 되살리지 않고서는 이 꽉 막힌 답답한 삶의 늪에서 벗어날 희망은 없다. 현대인에게는 어색하게 들리겠지만 그는 이 모든 것을 넘어서는 초월 차원을 위대한 종교 전통―야스퍼스 이후에 널리 쓰이게 된 말로 하면 ‘굴대’ 문명(axial civilizations)―에서 찾는다. 이 초월성에서 세속의 만족을 넘어서는 그 어떤 것에 대한 책임과 범세계 공동체에 대한 책임도 끌어낼 수 있고, 관심과 삶을 보편 수준으로 끌어 올릴 수도 있다. 이 차원에 잇대어 있는 것이 하벨이 말하는 도덕이고, 이 도덕의 실천 행위가 정치이다.

이 생각은 우리 사회에 어울리지 않는다. 정치를 이야기하면서 ‘진리’를 거들먹거리는 것은 도무지 걸맞지 않다. 온몸이 진흙 투성이가 되는 것이 정치의 정도처럼 이해되고, 정치판은 다름 아닌 그 진흙탕이라고 믿고 있는 나라에서, 정직이니 진실이니 진리니 하는 말은 서먹서먹하고 오히려 이상하다. 모두가 잘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 이상 더 절박하고 더 호소력 있는 가치 이념을 갖지 못한 나라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바로 이 까닭에 하벨의 실천 도덕으로서의 정치는 우리에게 도전이다.

얼핏 보면 다양한 배경을 가진 자들이 정치판에 모여 있는 것 같다. 이런저런 직종에 세대도 다양하다. 대학 강단에 섰던 자들도 끼어 있다. 이들 가운데는 실천 도덕의 정치를 구현코자 할 세력이 나올 법도 하고, 그러한 생기를 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찬찬히 보면 그렇지 않다. 자신이 소중히 여기고 다듬어온 도덕 관심과 가치를 투입하는 대신에 정치판에 맞추고자 한다. 정치 세계에 들어선 이상 술수와 책략의 정치판 습속에 하루속히 맞춰야 한다는 듯이 다른 관심과 가치를 잘라내 버린다. 숫제 그러한 무리가 정치판에 모인다. 그러지 않으면 정치를 할 수도 없고 연명할 수도 없다는 판단에서일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정치판은 겉으로 보이는 다양성과는 달리 획일하다. 모두가 책략 정치의 ‘단일 차원’에 흡수되어, 실천 도덕의 힘을 받는 ‘복합 차원’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의 정황으로 보아 우리의 정치가 형식 다양성을 떨쳐내고 실질 다양성을 획득하여 복합 차원을 확보하기까지는 엄청난 집합 노력과 함께 상당한 세월이 지나야 할지 모른다. 우리의 정치에 새로운 변화의 활력을 불어넣을 수 없다면 그 세월은 훨씬 더 길어질 것이다.

어찌하겠는가?

정치판을 탓하면서 그것을 정치 집단에 맡겨버리고 모두가 뒤로 물러서서 팔짱 끼고 구경만 할 수는 없다. 하벨이 말하는 실천 도덕의 정치를 감당하기에는 우리의 정치가 너무도 저질스럽다고 해도 정치에서 자신의 삶을 분리시키거나 아예 퇴거해서는 안 된다. 겨우 선거철에만 반짝하는 관심과 참여에 멈춰서도 안 된다. 이것은 시민다움의 포기이고 무책임함이다.

‘더욱 높은 것’에 대한 책임을 새겨야 하는 도덕 능력을 시민 스스로 기르고 다지는 것은 불가능한 것인가? 실천 도덕의 정치를 시민사회 쪽에서 익혀 정치 영역과 대화하고 긴장하며 대결하는 것은 어떤가? 이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지켜가고자 하는 시민 세력이 있다면 구태와 타성의 선거 공학에 젖은 정치권보다 더욱 유연하고 더욱 멀리 역사를 바라볼 수 있지 않겠는가? 이 정치판에 익숙한 사람일수록 이러한 생각이 실현 불가능하다는 뜻에서 꿈같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하벨처럼 ‘불가능한 것’이라고 하는 그것을 더욱 높은 책임의 차원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는 희망의 뜻에서 이것은 저버릴 수 없는 꿈이다. 이 꿈이 어디 한두 사람만의 것이겠는가? 질척질척한 탐욕의 진흙탕 정치판이 공공의 선을 위해 시민이 함께 만나는 열린 마당이 되고, 모사꾼이 득실거리는 무대가 시민 모두가 편히 드나들 수 있는 도덕 청사진의 전시장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 꿈이 아니고서는 정치판 사람들과 만나면서도 그들과 맞설 수 있는 시민의 힘이 일어나지 못할 것이며, 현실 비판 능력과 책임 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시민다움이 여물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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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신,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

박영신 교수는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이다. 한국사회이론학회의 초대 회장과 한국사회운동학회의 초대 회장을 역임한 한국 사회학의 대가이다.

학문뿐 아니라 환경 운동 등 시민사회의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왔고 녹색연합의 상임대표, 서울시/녹색서울시민위원회 지속가능발전위원회위원장, 환경부/민간환경단체 정책협의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현재 사단법인 녹색교육센터의 이사장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새로 쓴 변동의 사회학》(1996), 《실천 도덕으로서의 정치: 바츨라프 하벨의 역사 참여》(2000), 《한국의 시민과 시민사회》(2010) 등이 있으며 《다시 읽는 막스 베버》(2015)를 공동 집필하는 등 활발한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연세대학교에서 교육학 학사(1960), 동대학원 석사(1966)와 미국 예일대학교(Yale University) 종교학 석사(1968), 미국 UC 버클리(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에서 사회학 박사(1975) 학위를 취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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